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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여권, 대통령, 국방부로부터 시작된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에 대한 각각의 입장을 정리해 봤습니다. 국방부에서 이전하기로 결정했다고 하는데 아직 모르는 일이죠. 이번 기회에 홍범도 장군의 생애에 대해 좀 더 이해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래를 클릭하면  한국으로 귀국하는 모습을  보실수 있습니다. 이때 맞이하는 공군조종사의 절제된 목소리가 울컥하게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홍범도 장군님의 귀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지금부터 대한민국 공군이 안전하게 호위하겠습니다. 필!승!"

 

홍범도 장군 흉상

 

I  홍범도 장군 생애

홍범도 장군은 평안도 평양부에서 43년에  출생하여 광복을 못 보고 43년 10월 25일 75세의 나이로 영면에 드셨습니다. 국적은 조선에서 태어나 대한제국, 일본제국, 소련을 거쳐 지난 정권에서 대한민국 국적을 부여했습니다. 국적으로만 보아도 파란만장한 인생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현재 국립대전 현중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묻히셨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양반집에서 머슴살이하던 아버지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했고 아버지도 9살 되던 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양반집의 머슴으로 보내졌고 10대 중반에 평양 감영의 나팔수로 입대합니다. 사격을 잘해서 명사수로 이름을 날렸는데 군수품을 빼돌리는 악질 상관을 살해하고 탈영했습니다.

 

도망을 다니다가 금강산 신계사라는 절에서 출가를 하게 되고  26세에 지담스님의 상좌가 됩니다. 이때서야 홍범도 장군은 글을 깨치고 한국사를 배우게 됩니다. 승려신분으로 비구니였던 이옥구를 임신시킨 뒤 환속하였으며  제지공장에서 3년간 일했으나 임금을 주지 않은  친일파 공장주를 살해하고 1895년 을미의병 발생시기까지 사냥꾼으로 생활합니다.

 

 

II. 홍범도 장군의 항일활동

사격을 워낙 잘해서 포수들의 지지를 받아 '포계'라는 권익 단체를 만들어 대장이 되었고 이후 을미의병을 일으키게 됩니다. 요즘말로 하면 전설의 스나이퍼였는데요 1896년 을미의병을 정리하고 산에서 다시 포수생활을 합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시에는 의병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고종의 퇴위와 군대해산을 계기로 국내 포수들의 총기단속이 시작되자 다시 포수들을 모아 의병활동을 일으킵니다. 

 

6~700명 정도의 의병으로 함경도와 강원도 북부에서 활동하였으며 이 시기 일본군상대로 37회의 전투를 치렀습니다. 아내는 일제에 고문으로 옥사하고 아들 홍양순은 아버지와 전투 중에 전사합니다. 원래 아들은 일제의 권유로 아버지를 투항시키러 갔지만 아들의 권유에 홍범도장군은 그 자리에서 아들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었다고 합니다.  차남 홍용환도 연해주에서 아버지와 의병활동 중에 결행으로 병사합니다.

 

1910년 일본에 병합되면서 홍범도 장군은 1911년 연해주로 망명하였고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점으로 하는 독립운동 단체와 연계하여 일본과 유격전을 펼쳤습니다.  지금 논란이 되는 공산주의 이력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있었습니다. 

 

 

홍범도 장군 흉상

III.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와 소련

1920년 봉오동 일대에서 무장독립운동 단체들이 결성하여 북로 제1군 사령부장이 되었고 봉오동천투와 청산리 전투에 참여해 우리가 알고 있는 큰 활약을 합니다. 주도적인 인물은 김좌진 장군이었지만 우파인사였고 말년에 인심을 잃어서 중국 내 한인 사회에서는 지휘관으로 홍범도를 더 높게 평가했다고 하며 일본의 보고서에서도 홍범도 장군은 높이 평가했다고 합니다.

 

계속된 일본군의 토벌전과 만주 군벌과의 충돌로 독립군 세력은 소련 영내로 탈출하고 그 과정에서 제국주의에 탄압받던 소수민족과 연대하던 소련의 방침은 매력적인 선택지였습니다.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하였고 여기에서 레닌이 트로츠키를 통해 홍범도를 따로 불러 단독 면담을 하고 권총을 선물했습니다.

 

이후 1922년 일본의 연해주 간섭군 철수를 조건으로 항일무장투쟁 단체의 해산이 이루어졌고 홍범도 장군은 독립군도 무장해제되었습니다. 동료들은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가거나 다른 지방으로 갔지만 홍범도 장군은 갈 곳이 없어 러시아에 남게 되었다고 합니다.

 

 

홍범도 장군 흉상

IV. 노후

1923년 연해주 남부 지역사회의 지도자가 되었고 27년 소련 공산당에 정식입당했으며 1937년 스탈린에 의해 고려인 강제 이주로 카자흐스탄으로 이주되었습니다. 이후 고려극장에서 수위장을 하면서 편안한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1942년에 고려극장이 옮겨가고 정미소 노동자로 일하다 1943년 노환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V.봉환과정

ㆍ1962.10.25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

1991년 김영삼 대통령이 유해송환을 추진했으나 남북 대사관 간 외교 전 때문에 불발됩니다. 이때만 해도 북한이 더 앞서서 유해송환을 추진했으나 고려인 사회에서 거부했습니다.

1995년 광복 50주년 맞아 정부 조사단을 카자흐스탄에 파견하여 유해송환을 협의했으나 북한에서 평양으로 송환을 주장하면서 다시 무산됩니다.

1997년 5월 한국 국가보훈처에서 홍장군 묘역정비를 하고 기념비를 건립하며 공원을 단장했습니다.

2021년 8월 12일 카자흐스탄 대통령 방한과 연계하여 홍범도장군의 유해를 송환하기로 하고 국가보훈처장을 특사로 하는 특사단을 파견합니다. 영화 암살과 대장 김창수에 출연한 조진중배우가 동행하게 됩니다. 

ㆍ2021년 8월 15일 유해를 실은 군 수송기가 서해방곡식별구역에 진입했을 때 공군이 운영하는 모든 종류의 전투기가 출격하여 최고의 호위를 하였습니다. 

2021년 8월17일 건국훈장 최고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추서.

 

홍범도 장군 흉상

 

V.홍범도 장군 흉상 육사 철거논란

홍범도 장군 흉상을 육사에서 철거하자는 논거는 홍범도 장군의 공산주의 입당 이력입니다. 공산주의 이력을 가진 장군에게 육사생도가 경례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홍범도 장군의 생애를 정리하면서 느낀 점은 첫째는 공산당에 가입한 이유가 독립을 위한 것이라는 점. 두 번째 독립되기 전이므로 한국전쟁과 관련이 없다는 점에서 이 논란이 의미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